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시오 광독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고 처리 경위 == 세월이 더 지나 [[1890년]] [[여름]]에 이르면 이미 나무가 전부 죽어버린 산에 비가 내리면서 심각한 수준의 [[산사태]]와 [[홍수]]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. 피해를 입은 각 마을에서는 후루카와에게 손해 배상과 [[제련소]] 이전을 요구하고, 이를 현지사에게 건의하기로 결의했다. 그 결과 [[1897년]]에는 광산에 광독을 중화할 장치를 설치할 것을 후루카와 측에 지시했지만,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. 이후 각 [[촌(행정구역)|촌]]과 [[도치기현]] [[중의원]]인 [[https://ja.wikipedia.org/wiki/%E7%94%B0%E4%B8%AD%E6%AD%A3%E9%80%A0|다나카 쇼조(田中正造)]] 등이 항의를 계속했지만, 정부는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했다. 오히려 [[1900년]] 2월에 광독 피해주민들을 [[폭도]]로 몰아 탄압했다. 100여 명이 체포되고 그 중 51명이 재판을 받아 치안경찰법이 적용되어 19명이 유죄를 선고받았다. 그리고 [[1892년]]과 [[1901년]]에 이루어진 조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피해를 입은 마을만 없애버리고 주민들은 강제로 이주시키는 행정조치만 이루어졌다.[* 세계 열강에 진입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가리지 않고 전력을 쥐어짜내던 당시 [[일본 정부]]의 입장에서, 공업 기반은 물론 수출 자원이 되는 구리의 생산을 절대 포기할 리 없었다. 광산에서 나오는 이익에 비하면 '사소한' 주민 피해 따위는 신경 써줄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. 또한 광산 소유주인 후루카와 이치베에는 정계의 거물이자 당시 [[농림수산성|농수산성]] 대신이었던 [[무츠 무네미츠]]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들인 관계였다.] 다나카 쇼조는 [[일본 국회|제국의회]]에서 한 발언이 정부에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자, [[1901년]] 중의원 의원을 사직하고 [[메이지 덴노]]에게 직접 상소를 올렸다가 저지당한 뒤 '''관리 모독죄'''로 감옥에 들어갔다.[* 여담으로, 이 때 압수당한 직소장은 '''무려 113년 후'''인 [[2014년]]에 [[아키히토]]에게 전달되었다.] 그나마 다나카에 대한 구제 운동이 일어나면서 광독 사건에 대한 관심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, [[러일전쟁]] 직전인 [[1904년]] 초가 되어 정부에서 후루카와 재벌에 확실한 조치를 취할 것을 강제적으로 지시함에 따라, 어느 정도 사건은 마무리되기에 이른다. 그럼에도 정부의 피해 토지 강제 매수 등 절차에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다나카 쇼조는 전 재산을 탕진해 가면서 재판이나 항의 연설 등을 계속하다가 [[1913년]] [[8월 2일]]에 후원자의 집에서 지병인 [[위암]]이 악화되어 [[객사]]하였다. 향년 72세. 최종적으로 아시오에서 광산이 폐업한 것은 [[1973년]]으로, 이후 광산 주변 2개 [[현(행정구역)|현]]과 도시가 후루카와 광업과 공해방지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후루카와가 농지 상태 개선과 수질검사를 책임지고 실시하도록 합의하게 된다. 하지만 그때까지 꾸준하게 방류된 [[중금속]]은 아직도 강바닥에 퇴적되어 있는 상태로, 현재까지도 많은 비가 내리거나 강에 영향을 주는 사고가 발생하면 강바닥이 뒤집혀 중금속이 수면으로 떠올라 순식간에 환경 기준치를 초과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.[* [[2011년]] [[도호쿠 대지진]]이 일어난 후에도 와타라세강에서 기준치를 넘는 [[납]]이 검출되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